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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레위기 읽기의 방법

레위기를 본격적으로 읽어감에 있어 레위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정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을 둘러싼 과거의 정황, 그리고 그 본문을 읽고 있는 현재의 상황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레위기를 텍스트 있는 그대로 읽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따르자면 레위기는 제사법에 대한 매우 건조한 메뉴얼과 같이 인식된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규정된 성막과 성전 제의를 위한 모음집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는 당장 답해 주지는 못하지만, 레위기 본문을 읽고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 될 수 있다. 표면적인 본문 이해에 있어 중요한 것은 특정한 범위의 본문이나 구절만을 갖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보다 포괄적인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읽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본문의 역사적 정황이다. 레위기 본문은 이 텍스트가 드러내고 있는 광야와 성막 제의의 배경과는 다른 역사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고 여기며 레위기를 읽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은 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가진 입장으로 레위기에 포함된 제사장 자료(P) 내지 법이 실제로는 포로기나 그 이후 시대의 산물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출애굽기의 성막과 레위기의 종교법은 실제 이스라엘 왕국시대와는 상관 없는 포로기의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신정 국가의 유토피아 세계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에 반박하여 레위기의 내용이 실제 성소가 존재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정하여 읽느냐에 따라 레위기의 위치와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으로 책의 저작 시기를 고려할 때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 역사적 정황과 어느 정도의 교차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역사를 초월하는 과거 시대속의 문화와 심리적인 차원에서 본문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본문의 특정한 내용과 표현 양식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된다. 이를테면 레위기에서 제시되는 거룩의 의미는 무엇일까? 레위기는 왜 모든 규정에 대해 상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가?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는 다른 관점은 레위기 본문이 전달하고 있는 언어 형식이나 내용을 하나의 상징체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희생 제사가 현재 우리가 행하는 의식은 아니지만 속죄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상황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음식법의 측면 역시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라는 신학적 맥락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다각도의 방향에서 본문을 읽어냄으로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본문의 메시지의 ‘원형’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형은 ‘해석’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시대 속에서 다시 새롭게 적용될 수 있다. 해석은 본문이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 정당한 ‘메시지의 원형’에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근대적 해석학의 이점은 본문 해석에 있어 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혀갔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해석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레위기가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의 원형’이 무엇인지 탐구해 보고자 한다.

레위기를 바라본 학자들의 입장

포로기의 산물 (유일신 종교로의 진화)
왕국 시대의 산물 (유일신 종교 혁명)
광야시대 (종주권 조약의 관점)

신약에 나타난 제사에 대한 언급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2)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서 4:18)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7:27)

신약에서의 갱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율법, 즉 제사의 부정이 아니라 제사의 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구약의 제사를 그대로 행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은 우리의 신앙과 구원의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절기와 그리스도의 사역

구약의 절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는 구약과 신약, 특히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연속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월절 →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칠칠절 → (오순절) 성령 강림
초막절 → 열방의 제사 (스가랴 14:16)

시내산 이전까지의 제사

창세기
4:3-4 가인과 아벨의 제사 (מנחה, הביא)
4:26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לקרא בשם יהוה)
8:20 노아가 홍수 후 번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 (ויעל עלת במזבח)
12:7 아브라함이 쌓은 엘론 모레 제단 (מזבח)
12:8 아브라함이 쌓은 벧엘 제단 (מזבח),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ויקרא בשל יהוה)
13:3-4 벧엘과 아이 사이 (מזבח),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ויקרא בשל יהוה)
13:18 아브라함이 쌓은 엘론 마므레 제단 (מזבח)
21:33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ויקרא בשל יהוה)
22 아브라함이 모리아산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바치려고 함 (עלה, מזבח) - 희생. 임재
26:25 이삭이 브엘세바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מזבח, ויקרא בשם יהוה)
28:18 야곱이 벧엘에 돌을 세우고 기룸을 부음 (מצבה, ויצק שמן על-ראשה)
31:54 야곱이 길르앗 산에서 제사를 드림 (ויזבח יעקב זבח)
33:20 야곱이 세겜 앞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음 (엘엘로헤이이스라엘) (ויצב-שם מזבח)
35:7 야곱에 벧엘에 단을 쌓음 (מזבח)
출애굽기
17:15 모세가 르비딤 광야에서 단을 쌓음 (מזבח)
18:12 이드로, 아론,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드림 (עלה וזבחים)
제사의 중요한 요소 - 제사자의 선함, 신뢰, 의지, 고백,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 음식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1:29)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세기 9:3-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레위기 11:1-2)
위의 음식법의 변화를 통해 거룩과 음식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래 창세 때에 인간에게 주어진 음식은 식물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에게 고기 또한 음식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과 새 가운데에서 제사를 받으셨다. 즉, 하나님이 먼저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취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기를 음식으로 허락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규례는 피에 대한 금기이다.
즉, 고기를 먹기 위해 필연적으로 흘려야 하는 피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고 필요 이상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취하셨던 정결한 짐승만을 음식으로 먹을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레위기 11장에 나타나 있는 동물들 자체가 정결과 부정의 목록에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짐승의 존재 자체의 정결과 부정함을 나타내기 보다는 각 동물들을 취하는 행위의 정결과 부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위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 나타나는 규레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의 희생을 치르고 육식을 하라는 생명 존중의 측면에서 음식법에 접근해 볼 수 있다.

레위기 구성

제물과 제사에 대한 규정 (1:1-7:38)
제사장 위임식 (8:1-10:20)
정결법 (11:1-15:33)
속죄일 (16:1-34)
성결법전 (17:1-26:46)
서원과 십일조 (27:1-34)

성막의 구조와 레위기의 구성 비교 (Mary Douglas)

성막
시내산
바깥 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아래 기슭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성소 - 제사장
중턱 - 아론과 그의 자손들, 장로들
지성소 - 대제사장
정상 - 모세
레위기 1-7장 희생 제사와 제물에 관한 법과 속죄
레위기 11-15장 부정의 예와 16장 속죄의 방법
[레위기 17장 희생 제물에 대한 언급 (다시 원점)]
레위기 18-24장 더 깊은 정결의 단계
레위기 25-27장 땅(예루살렘)으로의 정착, 희년과 안식

성소 - 물리적 공간을 초월한 장소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

구약 성서에서 성전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했다. 그러나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성전이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의 모습과 그 역사를 바라보면서 성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모리아 산
성전과 관계된 간접적인 언급은 창세기 14장과 22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왕들과의 전쟁을 치룬 후,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살렘”은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세기 14:18)
여기서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유일신 하나님과 관련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하나님이 이미 이방인 멜기세덱에 의해 섬겨졌다는 것은 성전과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멜기세덱은 쿰란 문헌과 신약성서(히브리서)에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메시아를 나타내는 유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성전과 예루살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22장, “이삭 제물”(혹은 “이삭의 결박”)이야가에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으로 가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시고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나무에 걸려 있던 양을 바치게 하신다. 즉, 대속으로서의 제사 개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리아산”(מוֺרִיָּה)이라는 명칭과 아브라함이 이 곳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라고 부르는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יֵרָאֶה) 하더라 (창세기 22:14)
“모리아산”, “여호와 이레”, 그리고 “준비되리라” 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어근은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רָאָה이다. 이런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면 여호와의 산은 곧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곳”이 되며,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가 된다. 그러기에 모리아산은 성전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리아산과 성소와의 연결성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도 또한 나타나고 있다.
그 곳(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사무엘하 24:25)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역대하 3:1)
위와 같이 모리아산 = 다윗의 제단 = 솔로몬 성전 이라는 공식이 형성되고 있다. 이럼으로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의 지위가 확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막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성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의 성전이었다. 이 광야의 성전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의 매우 특별한 의미가 바로 이 성막에 드러나 있다. 출애굽기 32장은 이방 종교의 신 인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애굽기 3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의 형상”이 아닌 “신” 그 자체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사람들이 만든 우상 그 자체를 신으로 인식했다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 자체에 신성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결국 이는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하여, 편협한 지역의 수호신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성막의 구조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리는데에 집중한다. 성소를 여러 천으로 두르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을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막의 구조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노출된 것은 번제단이다. 이는 제사가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성막의 특징은 움직일 수 있는 천막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에 항상 함께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거하든지 간에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특징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할 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또한 잘 드러나고 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사무엘하 7:5-7)
즉, 고정된 건물인 성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한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 건축된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성전)
솔로몬은 처음으로 고정된 건축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그렇다면 이 성전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갇히신 존재가 되는 것인가?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 8:30)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8:33-34)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8:41-43)
위 솔로몬의 성전기도는 성전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위 기도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성과 성전의 보편성은 “기도”의 행위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성전은 제사만의 장소가 아니라 기도의 장소이다. 기도 역시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전 밖, 약속의 땅 밖에 있다 할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에” 속죄가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고 있으며, 또한 기도의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괄한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를 통해 성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임재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에스겔 성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 물리적인 제사의 장소로만 여겨졌고, 기득권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그리고 잘못된 “성전 불패”의 신앙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진리의 본질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첫번째 예루살렘 성전은 안타깝게도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7년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솔로몬 성전의 파괴는 유다 백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매우 심각한 신앙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전(신전)은 신이 거하는 집,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독자적인 성전 신학을 보여주고 있지만, 유다 백성들은 성서적이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성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보편성과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에스겔서는 이를 다시 한번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다.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빠져 나가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성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바벨론으로 함께 하시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성막 시대의 성전의 개념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에스겔 11:16)
그리고 에스겔서는 새롭게 건축되어야 할 이상적인 성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성전은 1차 성전과는 달리 정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뜰이 크게 확장되어 드넓은 바깥뜰의 공간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앞선 성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성전과 예루살렘의 연관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과 비현실적인 규모 등은 에스겔서의 성전이 종말론적 혹은 초월적 성전 개념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크게 확장된 뜰은 더욱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 확보와 동시에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거룩의 단계를 분화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거룩의 정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성전 동편으로 흘러 나가는 물은 사해를 담수로 만들만큼 유대 광야를 풍요롭게 만둘 것이라는 예언이 선포되고 있다. 동편은 포로의 땅 바벨론과 삭막한 유다 광야를 상징한다. 바로 성전을 통한 비극적인 유다 백성들의 회복이 에스겔서의 성전 환상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 성전과 신약 성서

2차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은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유다로 귀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도 고대하던 두 번째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기원전 516).
스룹바벨 성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 두 번째 성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성전이 존재했던 시기와 쿰란 공동체의 역사 시기가 겹치게 된다. 그리고 헤롯 시대에 이르러(기원전 20~19년 경) 성전이 대대적으로 확충된다.
흥미롭게도 헤롯 성전에는 에스겔서의 성전과 같이 바깥뜰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은 엄연히 다른데 헤롯 성전은 바깥뜰을 “이방인의 뜰”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 공간은 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때 생긴 공간으로 이방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관광지 내지, 제물을 사고 팔거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돈을 환전하는 시장의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전의 모습에 대한 비판은 특히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6)
복음서에서 성전은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는 구절도 찾아볼 수 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1-4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누가복음 21:5-6)
기독교 전통에서 성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전히 대체되었기 때문에 성전은 완전히 부정된다. 비잔틴 시대 때,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 성전산에 성전이 회복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3. 성전과 쿰란 공동체

쿰란 공동체 역시 당시의 2차 성전 제의와 그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성전을 대체하는 말씀과 기도 중심의 신앙 생활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와 달리 여전히 성전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전 중심의 속죄 신학은 여전히 유대교의 중심이었고,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쿰란 공동체 내에서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았고, 이들의 메시아 사상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메시아 즉, 아론의 메시아가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전은 이들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쿰란 공동체의 이상향이 성전문서(11QT)에 일차적으로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