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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쿰란 공동체와 성경의 역사

1. 20세기 최고의 발견

쿰란 지역과 사해 사본의 발견은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947년 베두인 목동에 의해 성서 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던 첫번째 동굴이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도 사본을 담고 있을 만한 동굴들의 조사와 수색은 계속되고 있다. 이 쿰란 지역과 그 주변 사해 지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사본들은 우리에게 x특히 성서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앞선 강의에서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히브리어 성서 본문 역사를 탐구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증거 사본들의 연대가 기원 후 8세기 이후로 비교적 늦은 시기라는 점이다. 가설적인 히브리어 성서 사본의 형성 시기(기원전 6세기~2세기)와 마소라 코덱스 사본들(8세기, 10-11세기) 사이의 간극을 그리스어역 성서(70인역)나 아람어 번역 성서인 타르굼, 그리고 라틴어 역 불가타 성서 등이 채워줄 수도 있기는 하지만, 히브리어로 된 사본이 아니라는데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리고 일부 번역본들의 경우 번역가의 해석이나 첨가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히브리어 성서의 원본은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작성된 사본들이 쿰란 지역과 사해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모든 히브리성서의 책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아니고, 또한 에스더서의 경우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본문 증거들은 성서 역사의 커다란 간극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는 가치있는 자료로 여전히 중요하게 연구되고 있다.
사본들이 발견된 사해 주변 지역들
다양한 사본들이 발견된 쿰란 주변의 동굴들

2. 새로운 사해 사본의 발견

지난 2021년 3월 16일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사해 사본 조각이 발견되었다. 1956년에 마지막 사본이 발견된 이래, 근 70년만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 곳에서 발견된 20여개의 양피지 두루마리에는 스가랴서와 나훔서의 일부가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 문헌들은 바르 코크바 항쟁 때(c.135) 남겨진 성서 문헌으로 추정된다. 두루마리와 함께 발견된 동전들에 새겨진 종려나무 형상들은 이스라엘의 독립(마카비 항쟁). 혹은 성전과 연관(초막절)되어 있다. 스가랴서 9:9은 메시야의 임재와 관련된 성서 구절이다. 당시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싸웠던 전쟁의 상황 가운데에서 유대인들의 최후의 승리와 관련된 성서 구절들을 선별하여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도 발견되고 있는 사해 사본은 사해 주변, 유대 광야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 무렵 작성된 문서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해 사본들이 사해 북부 쿰란 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좁게는 쿰란 사본이라 지칭되기도 한다.
사해는 예루살렘의 동편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형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이 높은 산지를 이루고 계속해서 동편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유대 광야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동편 유대 광야 쪽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해발고도 0m, 즉 지중해 해수면의 위치와 동일한 지점(the sea level)을 지나가게 된다. 그 지역을 넘어가면 나오는 사해는 그보다 400미터 더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해 극단적인 푄 현상으로 메마른 광야 지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지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게 되면 광야쪽 비탈을 따라 많은 물이 흘러 내리게 되는데, 우기 동안 중앙 산지로부터 광야 지대로 물이 내려가고 이 물을 이용해서 광야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베두인들)이 현재까지 있다.
바로 이 황량한 광야에서 수천년간 사람들이 살아 왔으며 놀랍게도 1947년 어느 날, 한 베두인 목동에 의해 유대 광야 동굴 속에서 고문서들이 발견되었다.

3. 사본의 발견 과정

John Trever 교수의 기록에 따른 쿰란 문헌의 발견 과정 (John C. Trever, The Untold Story of Qumran, 1965)

3.1. 베두인들의 동굴 발견

1947년 겨울, 혹은 봄철 어느 날, 타아미레흐(Ta’amireh) 부족의 일원이었던 세 명의 베두인 목동들이 사해 북서쪽에서 쿰란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팔레스틴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있었다. 이들 가운데 쥬마 무하마드 칼릴이 동굴 탐사를 특히 좋아했는데, 굴 여기저기에 돌을 던지다가, 한 동굴에 돌을 던졌을 때,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동굴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고, 그 다음날 Muhammad ed-Dhib(Muhammad ahmed el-Hamed가 본명)가 동굴에 들어가 그 안을 확인하였는데, 그 안에서 그는 10개의 항아리를 발견한다. 그 가운데 두 개의 항아리를 제외한 나머지 항아리는 비어 있던 상태였다. 무언가가 들어있던 2개의 항아리 가운데 하나는 흙만 들어 있었고, 다른 항아리 안에 세 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세개의 두루마리는 나중에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공동체 규율 두루마리, 그리고 하박국 주석서로 확인되었다. 나중에 베두인은 4개의 두루마리를 더 발견하게 되는데 이 두루마리는 감사찬송집, 이사야 사본 일부, 전쟁 문서. 창세기 외경서 등으로 확인된다.
이 사본들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베두인들은 1947년 3월에 베들레헴의 골동품 판매상인 칸도(Khalil Iskandar Shahin)에게 이 사본의 감정을 부탁한다. 칸도는 시리아 정교회 신도였는데, 다른 신자를 통해 성마가 수도원의 아나타시우스 예슈아 사무엘 대주교와 접촉하게 된다. 당시 칸도는 사무엘 대주교에게 베두인들이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Juma'a Muhammad와 Muhammad ed-Dhib
Athanasius Yeshua Samuel
Eleazar Sukenik
1947년 여름에 베두인들은 직접 주교를 찾아갔고, 처음에 사무엘 주교는 베두인들의 허름한 옷 차림 때문에 구걸하러 온 것으로 착각하여 돌려 보내려고 했으나, 곧 이들이 고문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들에게서 4개의 두루마리를 24파운드(당시 돈으로 100불)에 구입한다. 사무엘 주교가 당시 베두인들에게서 구입했던 두루마리는 이사야 두루마리, 공동체 규율, 그리고 하박국 주석서와 창세기 외경서 였다.
한편, 동예루살렘 전망산에 설립되었던 예루살렘의 첫 대학 히브리대의 고고학과 수케닉 교수는 베들레헴에 고대 사본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히브리대 주변 밖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매우 위험했다. 그럼에도 그는 베들레헴에 몰래 두 차례 (1947.11.29와 12월) 방문하여 세 개의 두루마리를 구입하여 입수하게 된다. 그가 입수했던 세개의 두루마리는 감사찬송집, 전쟁 두루마리, 두번째 이사야 두루마리 등이었다.
한편 사무엘 대주교는 그가 베두인들로부터 구입한 두루마리들의 정체를 알고 싶어 했고, 그의 지인 안톤 키라즈는 수케닉 교수에게 사무엘 대주교가 갖고 있던 4개의 두루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 덕분에 수케닉 교수는 그 두루마리들을 짧은 시간이나마 보관하며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이 새로운 두루마리들이 그가 구입했던 베들레헴의 사본들과 동일한 곳에서 온 것임을 알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는 사무엘 주교의 두루마리들을 사려고 했지만 사무엘 대주교는 이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동굴에서 나온 일곱 개의 두루마리들은 각기 사무엘 대주교와 수케닉 교수에 의해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관리되게 된다.
수케닉 교수는 수소문 끝에 이 두루마리가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이 두루마리들이 매우 오래된 사본이라고 알아보았고, 이 두루마리들을 에세네파와 연관시켰던 첫번째 학자가 바로 수케닉 교수였다. 그가 이 두루마리들을 에세네파와 연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로마의 지리학자 플리니(Pliny) (23-37)가 이스라엘 지역을 여행하면서 남긴 사해 엔게디 근방에서 살았던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 때문이었다.
[사해] 서편, 에세네파는 불결한 해안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정착했다. 이들은 온 세상의 이들의 존경을 받는 특별한 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없었고, 남녀 관계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돈도 가지지 않고, 가진것이라고는 대추야자 나무들 뿐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매일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거듭났다. 오락가락하는 운명에 지친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관습을 받아들인다. 믿기지 않지만 수천세기동안 아무도 출생하지 않은 인종이 존재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 유익한 것은 과거의 삶에 대한 회개이다. 에세네 아래쪽에는 엔가다[엔게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풍요와 야자수림에 있어서는 예루살렘 다음이었다. 오늘날에 이 곳은 잿더미가 되었다. 여기를 지나면 바위 위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곳은 아스팔트 호수(사해) 근처에 있다. (Pliny, Natural History 5.73)
한편, 1948년 2월에 대주교는 예루살렘의 미국 동방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윌리엄 브라운리와 존 트레버와 접촉한다. 사진사이기도 했던 트레버는 대주교의 문서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이를 예일대에 보낸다. 예일대의 Millar Burrows는 이 문헌을 몇 시간 동안 연구한 이후에 감리교의 “Discipline”(교리와 장정)을 연상하여 이 두루마리에 “the Manual of Discipline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Millar Burrows (가운데 우편), John Trevor, William Brownlee (왼편)
2월에 트래버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올브라이트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고, 올브라이트 교수는 즉시 그에게 발송된 샘플이 매우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뉴헤이븐의 미국 동방학 연구소는 1948년 4월 11일에 보도자료를 내었고. 런던의 The Times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낸다(1948. 4. 12).
예일대는 어제 팔레스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사야서 사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본은 예루살렘의 성마가 시리아 교회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이 두루마리의 정체는 예루살렘의 미국 동방 연구소의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 연구소에서 3개의 다른 고대 히브리어 두루마리들을 검토했는데, 하나는 하박국서 주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종파 혹은 수도 공동체, 아마도 에세네의 규율서로 보인다. 세번째 두루마리는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위 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두루마리에 관한 최초의 보도는 두루마리가 발견된 장소에 대해 다른 정보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두루마리가 발견된 장소를 비밀리에 부치려고 했던 의도였을 것이다. 당시 각 사본의 연대는 문자 필사 방식을 근거로 하여 추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번째 두루마리가 창세기 외경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에 대한 보도가 나간 이후, 4월 26일 수케닉 교수는 그가 구입했던 두루마리들에 대한 보도 자료를 발표하고, 사본들이 발견된 장소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게 된다. 이에 관한 기사는 25일 뉴욕 타임즈 기사에 실리게 되는데, 10개의 두루마리가 바로 엔게디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J. L. Melzer).
이 보도가 나간 이후 Millar Burrows는 이 사본 두루마리가 시리아 교회에서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둘러대었고, 자신은 시리아 교회를 통해 본 사본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후 1948년 4월, 저명한 성서 고고학자 올브라이트는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에 이 사본들의 발견에 대한 소식을 싣게 된다. 그는 이 사본들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발견은 신구약 성서 연구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며, 신약의 배경과 구약의 본문비평과 해석에 대한 현존하는 모든 연구를 구식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 사본들은 수년이 지나 번역되어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미 동방학 연구소가 취득했던 사본들은 1950년과 1951년도에 출판되었고, 수케닉의 사본들은 1954년에 출판되었다. 창세기 외경은 자료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1956년에야 출판된다.
사무엘 대주교는 당시 팔레스틴의 정치적인 불안 때문에 사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는 미국으로 가져가 판매하려고 했지만, 소유권 문제 때문에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 1954년 6월 1일자 신문에 이 두루마리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조그맣게 낸다.
이 신문 광고는 수케닉 교수(1953년에 사망)의 아들인 성서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의 주목을 이끌어 내었다. 야딘 교수는 중개인을 통해 이 두루마리를 25만불에 구입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가엘 야딘 교수는 1955년 2월 13일, 쿰란 1번 동굴에서 발견된 일곱 개의 첫 사해 사본 두루마리들이 이스라엘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고 발표한다. 이 두루마리들은 현재 이스라엘 백물관의 책의 전당과 록펠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책의 전당
사무엘 주교가 올린 사본 판매 광고(월스트리트 저널. 1954년 6월 1일)

3.2. 동굴들의 탐색

이후 학자들은 사본이 발견된 정확한 동굴의 위치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여 수색하기 시작했으나,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고, 그 다음날 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 광야 지역은 요르단 왕국의 영토가 된다. 이에 동굴 탐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야 동굴 탐사가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당시 벨기에 군인 Philippe Lippens 대위가 동굴의 위치에 흥미를 갖게 되고 정보를 수집하여 1949년 1월 28일에 드디어 쿰란 제1번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요르단 문화재국의 담당자 Lankester Harding과 예루살렘 에콜비블릭의 Roland de Vaux가 이 곳에 와서 연구를 하게 된다.
제1차 고고학 탐사는 1949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진행되는데, 이 동굴에서 그릇, 옷감 등과 같은 많은 유물들과 더불어 70여개의 파편 조각들이 더 발견된다. 그리고 이 사본들 가운데 몇몇 조각들은 베두인들이 가지고 온 사본에서 떨어진 조각으로 판명되는뎅, 이러한 증거를 통해 당시 발견된 동굴이 베두인들이 찾았던 동굴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남쪽으로 반마일 떨어진 곳에 옛 주거터가 있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 주거 지역의 흔적이 사본들이 발견된 동굴과 관계가 없고, 1세기 경 존재했던 로마의 요새라고 여겼다(1914년 Gustav Dalman 독일 고고학자의 의견). 1861년 Felicien de Saulcy는 이 지역을 소돔과 고모라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 지역의 아랍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Goumran)에 따라 쿰란이라 이름을 짓는다.
1950년대에 이 부근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수색과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1951. 11.24~12.12에 걸친 발굴 작업 후에 하딩과 드 보는 동굴과 쿰란 주거터와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두 지역 모두, 유사해 보이는 토기와 두루마리를 담은 항아리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번 동굴 - 1952년 2월 타아미레흐 베두인에 의해 발견. 33개의 사본 조각들
3번 동굴 - 1952년 3월 10일~20일 에콜 비블릭의 롤랑 드 보와 ASOR의 윌리엄 리드(William Reed)의 발굴팀이 발견. 14개의 사본들, 청동사본
4번 동굴 - 1952년 8월 키르벳 쿰란 근처. 이 동굴에서 총 566개의 사본들이 발견. 가장 많은 사본들이 발견된 동굴
5번 동굴 - 1952년 발견.
6번 동굴 - 5번 동굴과 거의 동시에 베두인에 의해 발견.
7,8,9,10번 동굴 - 1955년 2월과 4월에 발견 (5~10번 동굴에서는 적은 수의 사본)
11번 동굴 - 1956년 2월 베두인에 의해 발견. 23개의 사본들이 발견.

3.3. 사본 기호를 매기는 방식

발견된 동굴 순서 + Q (qumran) + 사본 이름 혹은 번호
1 + Q + Isa + a
11QTargum of Job = 11QtgJob = 11Q10

3.4. 쿰란 공동체의 정체성

쿰란 공동체는 당시 왕이 대사장직의 지위까지 겸직하고 있었던 하스모니안 왕조의 정책에 반하여,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잘못된 제사라 부정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사해 근처 광야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종교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쿰란 공동체는 매우 폐쇄적인 성격의 공동체였으며, 자신들의 “빛의 아들”, 그리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어둠의 아들들”이라 규정하여 최후의 전쟁 때에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사야 그리고 진정한 제사장이 성전 제사를 회복하기 전까지 이들은 말씀의 순종과 정결례, 그리고 기도 등의 경건 생활을 함으로 성전 제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겼다.
성전을 부정하고 광야를 택했던 이유는 이들이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라는 말씀을 자신들의 정체성의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주후 67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멸망해 버리고 말았지만 이들이 동굴안에 깊숙히 숨긴 두루마리들은 성경의 신비로운 역사를 밝히기 위한 귀한 자료가 된다.

4.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성서
발견된 문헌수(추정)
창세기
20(21)
출애굽기
16
레위기
12(13)
민수기
6(7)
신명기
30(32)
여호수아
3
사사기
4
사무엘서
4
열왕기서
3
이사야
21
예레미야
6
에스겔
6
12선지서
8
시편
34(36)
잠언
4
욥기
4
아가
4
룻기
4
애가
4
전도서
4
에스더
0
다니엘
8
에스라
1
느헤미야
1
역대기
1
206(213)
동굴번호
발견된 두루마리(추정)
1
16(17)
2
16(17)
3
3
4
148(149)
5
7
6
6(9)
7
0
8
2
9
0
10
0
11
8
0
206(213)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가운데 성서 본문은 전체 930개로 전체 사해 사본들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된 사본들은 신명기, 이사야, 그리고 시편 등인데, 이는 쿰란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신명기 - 율법이 중요시
이사야 - 메시아 사상과 연관
시편 - 예배, 기도와 관련
위의 책들은 신약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책들이다. 위 통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성서의 책들이 고른 수로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수적인 불균형은 성서 책들의 정경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본들이 주로 필사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의 종류

1.
타르굼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 아람어는 2차 성전 시대 당시 일상생활 언어. 주석적인 번역. 랍비 시대에 쓰여졌다고 생각되었으나 2차 성전 시대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게 됨.
2.
성구함
테필린 기도문과 메주좉.
3.
외경과 위경
4.
외경
히브리 성경 외에 불가타와 칠십인역에 포함된 책 (히브리어 이외의 언어)
토비트, 집회서, 예레미야의 편지
5.
위경
히브리성서, 칠십인역, 헬라어, 랍비 문서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
에녹서, 거인들의 책, 희년서
6.
기타 문서
7.
성서 주석
a.
연속 주석: 하박국 주석, 나훔 주석, 시편 주석
b.
주제별 주석: 명시선집, 멜기세덱 문서, 언약서, 창세기 주석
8.
패러프레이즈
9.
규율문서
a.
다메섹 문서
b.
공동체 규율
c.
성전 문서
d.
할라카 편지 (4QMMT)
10.
예배서
11.
종말론적 문서
a.
전쟁 규율
b.
새로운 예루살렘에 관한 문서들
12.
지혜 문서
13.
청동 두루마리
14.
거래 문서들

5. 쿰란의 성서 사본들과 성서 본문의 역사

5.1. 쿰란에서 발견된 성서 본문들의 문자형에 따른 분류

Emanuel Tov, Textual Criticism of the Hebrew Bible, pp.104-5.
위와 같은 통계는 쿰란 공동체 당시 대부분 정방형의 글자로 성서가 필사되었지만, 일부 본문의 경우 여전히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까지도 상징적인 기호로써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사용된 예가 있다. 아마도 소수의 고대 히브리어로 된 사본들이 발견되는 것은 고대 히브리어 글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2. 필사상의 특징

Emanuel Tov, Textual Criticism of the Hebrew Bible, pp.112-3.
쿰란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성서 사본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완전 서법이 자주 활용된다는 것이다. 당시 불완전 서법으로 된 성서 본문이 읽히기 어려웠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발음이 약하거나 발음되지 않는 자음들은 남겨 놓기는 하지만 윗첨자의 방식으로 처리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의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일부 관사나 접속사가 다른 방식으로 부가되어 있는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5.3. 쿰란에서 발견된 성서 사본 유형

5.4. 성서 전승 역사에 있어 쿰란의 성서 사본들이 주는 함의

앞선 강의에서 살펴 보았듯이 칠십인역은 성서의 원본과 후대의 편집본들 사이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는 사본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번역본이라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번역본을 통해 히브리어 원문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여전히 하고 있지만 완벽한 복원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칠십인역을 통해 대두되는 문제는 칠십인역이 대본으로 삼았던 히브리어 본문과 우리가 현재 주된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소라(특히 레닌그라드 코덱스) 본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필사나 번역 과정 상에서 나타났던 문제인지, 혹은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과 마소라 전통의 히브리어 본문이 처음부터 달랐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사마리아오경의 경우 종파적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임의적인 추가나 변형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고 여겨져 성서의 원본을 재구성함에 있어 이 사본의 중요성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본문들의 알 수 없는 관계가 바로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쿰란 주변에서 발견된 성서 본문들은 대부분 히브리어(자음 텍스트) 본문인데 놀랍게도 칠십인역과 유사한 본문,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 전통과 유사한 본문, 그리고 마소라 전통과 매우 가까운 본문들이 모두 발견되었다. 즉, 같은 신명기 두루마리라 할지라도 각기 다른 버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원-마소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원-70인역: 4번 동굴에서 발견된 출애굽기, 레위기
원-사마리아오경: 4번 동굴에서 발견되 고대 히브리어 문자 출애굽기
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성경 형성 과정의 한 가지 가능성은 쿰란/예수님 시대, 오경과 예언서의 경우 어느 정도 정경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각 본문이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소라 전통의 본문과 유사한 본문들은 쿰란 주변부 보다는 마사다 등지와 같이 유대 반란 중심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마소라 전통의 본문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통용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다른 전통의 본문들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히브리어 본문들은 사장되어 갔고, 결국 마소라 전통의 히브리어 본문이 선택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