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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성전, 예수 그리스도

성소 - 물리적 공간을 초월한 장소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

구약 성서에서 성전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했다. 그러나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성전이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의 모습과 그 역사를 바라보면서 성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모리아 산
성전과 관계된 간접적인 언급은 창세기 14장과 22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왕들과의 전쟁을 치룬 후,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살렘”은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세기 14:18)
여기서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유일신 하나님과 관련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하나님이 이미 이방인 멜기세덱에 의해 섬겨졌다는 것은 성전과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멜기세덱은 쿰란 문헌과 신약성서(히브리서)에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메시아를 나타내는 유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성전과 예루살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22장, “이삭 제물”(혹은 “이삭의 결박”)이야가에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으로 가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시고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나무에 걸려 있던 양을 바치게 하신다. 즉, 대속으로서의 제사 개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리아산”(מוֺרִיָּה)이라는 명칭과 아브라함이 이 곳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라고 부르는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יֵרָאֶה) 하더라 (창세기 22:14)
“모리아산”, “여호와 이레”, 그리고 “준비되리라” 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어근은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רָאָה이다. 이런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면 여호와의 산은 곧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곳”이 되며,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가 된다. 그러기에 모리아산은 성전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리아산과 성소와의 연결성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도 또한 나타나고 있다.
그 곳(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사무엘하 24:25)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역대하 3:1)
위와 같이 모리아산 = 다윗의 제단 = 솔로몬 성전 이라는 공식이 형성되고 있다. 이럼으로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의 지위가 확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막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성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의 성전이었다. 이 광야의 성전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전의 매우 특별한 의미가 바로 이 성막에 드러나 있다. 출애굽기 32장은 이방 종교의 신 인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애굽기 3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의 형상”이 아닌 “신” 그 자체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사람들이 만든 우상 그 자체를 신으로 인식했다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 자체에 신성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결국 이는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하여, 편협한 지역의 수호신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성막의 구조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리는데에 집중한다. 성소를 여러 천으로 두르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을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막의 구조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노출된 것은 번제단이다. 이는 제사가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성막의 특징은 움직일 수 있는 천막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에 항상 함께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거하든지 간에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특징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할 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또한 잘 드러나고 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사무엘하 7:5-7)
즉, 고정된 건물인 성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한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 건축된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성전)
솔로몬은 처음으로 고정된 건축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그렇다면 이 성전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갇히신 존재가 되는 것인가?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 8:30)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8:33-34)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8:41-43)
위 솔로몬의 성전기도는 성전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위 기도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성과 성전의 보편성은 “기도”의 행위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성전은 제사만의 장소가 아니라 기도의 장소이다. 기도 역시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전 밖, 약속의 땅 밖에 있다 할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에” 속죄가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고 있으며, 또한 기도의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괄한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를 통해 성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임재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에스겔 성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 물리적인 제사의 장소로만 여겨졌고, 기득권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그리고 잘못된 “성전 불패”의 신앙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진리의 본질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첫번째 예루살렘 성전은 안타깝게도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7년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솔로몬 성전의 파괴는 유다 백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매우 심각한 신앙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전(신전)은 신이 거하는 집,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독자적인 성전 신학을 보여주고 있지만, 유다 백성들은 성서적이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성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보편성과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에스겔서는 이를 다시 한번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다.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빠져 나가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성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바벨론으로 함께 하시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성막 시대의 성전의 개념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에스겔 11:16)
그리고 에스겔서는 새롭게 건축되어야 할 이상적인 성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성전은 1차 성전과는 달리 정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뜰이 크게 확장되어 드넓은 바깥뜰의 공간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앞선 성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성전과 예루살렘의 연관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과 비현실적인 규모 등은 에스겔서의 성전이 종말론적 혹은 초월적 성전 개념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크게 확장된 뜰은 더욱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 확보와 동시에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거룩의 단계를 분화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거룩의 정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성전 동편으로 흘러 나가는 물은 사해를 담수로 만들만큼 유대 광야를 풍요롭게 만둘 것이라는 예언이 선포되고 있다. 동편은 포로의 땅 바벨론과 삭막한 유다 광야를 상징한다. 바로 성전을 통한 비극적인 유다 백성들의 회복이 에스겔서의 성전 환상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 성전과 신약 성서

2차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은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유다로 귀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도 고대하던 두 번째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기원전 516).
스룹바벨 성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 두 번째 성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성전이 존재했던 시기와 쿰란 공동체의 역사 시기가 겹치게 된다. 그리고 헤롯 시대에 이르러(기원전 20~19년 경) 성전이 대대적으로 확충된다.
흥미롭게도 헤롯 성전에는 에스겔서의 성전과 같이 바깥뜰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은 엄연히 다른데 헤롯 성전은 바깥뜰을 “이방인의 뜰”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 공간은 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때 생긴 공간으로 이방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관광지 내지, 제물을 사고 팔거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돈을 환전하는 시장의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전의 모습에 대한 비판은 특히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6)

3. 성전과 쿰란 공동체

쿰란 공동체 역시 당시의 2차 성전 제의와 그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성전을 대체하는 말씀과 기도 중심의 신앙 생활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와 달리 여전히 성전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전 중심의 속죄 신학은 여전히 유대교의 중심이었고,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쿰란 공동체 내에서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았고, 이들의 메시아 사상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메시아 즉, 아론의 메시아가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전은 이들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쿰란 공동체의 이상향이 성전문서(11QT)에 일차적으로 드러나 있다. 성전문서는 총 65열로(19두루마리 조각) 구성되어 있고 길이 9m의 두루마리이다. 이 문서의 저작 연대는 확실지 않으나 대략 기원전 2-1세기 정도로 추정된다(Wacholder - 의의 교사가 저자?). 두루마리 바깥쪽인 2-14열은 다소 훼손된채로 발견되었고, 15열 이후에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이 문서는 검은색을 띈 다른 문서들과는 달리 밝은 색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무기물 표면으로 처리된 흔적이 나타난다. 이 문서를 특별히 공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만큼 이 문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성전 문서의 내용
I. 서론: 시내산 언약 (출34:11-13; 신7:25-26; 출34:14-16)
II. 거룩한 도시의 성전과 제사
성전과 제단 건축 (3-13.8)
절기와 제룸에 관한 규례 (13.9-30.2?)
성전 뜰 건축 (30.3?-45.7)
성전과 거룩한 도시의 정결함을 위한 규례 (45.7-47.18)
III. 법들의 적용
정결법 (48.1-51.10)
사법제도 (51.11-51.18)
제의법 (51.19-53.8)
서원에 관한 규례 (53.9-54.7)
우상숭배 (54.8-55.21)
재판 절차 (56.1-56.11)
왕에 관한 규례 (56.12-60.?)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권리 (60.?-60.15)
죄의 증거에 관한 규례(61.6-61.12)
죽인 자를 알 수 없는 피살된 시체에 대한 속죄 의식(63.?-63.9)
가족법(63.10-64.6)
반역죄(64.6-64.13)
일상적인 규례들(64.13-65.7)
처녀인 표적과 강간에 대한 규례(65.7-66.11)
근친상간 금지법(66.11-66.17)
반역죄(64.6-64.13)
일상적인 규례들(64.13-65.7)
처녀인 표적과 강간에 대한 규례(65.7-66.11)
근친상간 금지법(66.11-66.17)
위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성전 문서는 성전 건축 과정과 제의방식,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인 규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전에 대한 묘사는 지성소에서 바깥뜰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이 세상에서의 규례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본 성전 문서가 성전 중심적인 사회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서를 입수한 야딘 교수는 성전에 대한 랍비 전통(Midrash Samuel, Buber ed., xv:3 (92))의 기록,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성전 두루마리, ...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여호수아가 장로들에게, 장로들이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이 다윗에게 다윗이 솔로몬에게"를 근거로 하여 “성전 두루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성전 두루마리의 내용은 성서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성전과 관련하여 성서에 누락되어 있는 성전 건축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 성전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보완하고 있다.
본 문서에서 묘사되는 정방형의 성전 모습과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에스겔의 성전 묘사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성전문서는 에스겔의 뜰 구분(바깥뜰, 안뜰)보다 한단계 더 추가된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안뜰 - 제사장, 중간뜰 - 구별된 남성, 바깥뜰 - 정결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는 성전에 접근하기 위한 정결의 정도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성전에 대한 규례를 전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시는 1인칭의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어 그 내용의 권위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전 문서는 자신들이 부정하는 성전 제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앙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해주고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의 부재는 예루살렘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는 성전의 개념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에스겔서와의 유비는 자신을 바벨론의 포로에 비견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시며, 지금의 성전이 아닌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신앙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성전의 붕괴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러나 결국 물리적인 성전은 무너지고 말았다. 성전의 마지막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1-4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누가복음 21:5-6)
그러나 이는 성전 자체의 무용론을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형식주의적인 제사에 집착했던 어리석은 제사자들을 향한 일침이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그것을 제하심으로 제사자들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종말을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다시 회복되실 것을 예견하신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건물의 회복은 아니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성전의 회복을 이루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는 제사 행위를 통해 해결될 수 없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그 권한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구원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성전 내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하고 일시적인 거룩이 아니라 일상 가운데에서의 거룩을 이루어내어야 한다. 레위기는 성전제의에 대한 규례에서 성결법전, 즉 일상적인 거룩에 대한 안내로 그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 진정한 거룩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